
편리해질수록 우리는 더 풍요로워지고 있는 걸까요. 저는 이 질문 앞에서 선뜻 그렇다고 답하지 못했습니다. 스마트폰 하나로 모든 걸 해결하는 삶이 익숙해진 어느 순간, 오히려 뭔가를 잃어버린 것 같다는 감각이 자꾸 따라붙었기 때문입니다. 크리스틴 로젠의 <경험의 멸종>은 그 감각에 이름을 붙여준 책이었습니다.
잃어버린 헤맴의 가치
어릴 때 아버지 일을 도와드리며 낯선 도시로 향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조수석에 앉아 커다란 종이 지도를 무릎 위에 펼쳐놓고 현재 위치를 가늠하던 일, 길을 잘못 들어 지나가는 행인에게 말을 걸던 어색함, 그리고 목적지에 닿았을 때의 묘한 성취감까지. 그 과정 전체가 하나의 경험이었습니다.
지금은 다릅니다. 내비게이션을 켜면 최적 경로가 실시간으로 안내됩니다. 틀릴 일도, 헤맬 일도,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걸 일도 없습니다. 편리함을 얻은 건 분명한데, 제 경험상 그 과정에서 공간을 몸으로 익히는 능력이 조금씩 옅어진 것도 사실입니다.
저자가 말하는 핵심 개념 중 하나가 바로 매개된 경험(Mediated Experience)입니다. 매개된 경험이란 현실을 직접 마주하는 대신, 기술이나 화면이라는 중간 레이어를 통해 간접적으로 세상을 소비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여행지에서 풍경을 눈에 담기보다 스마트폰 카메라를 들어 올리고, 공연장에서 무대를 즐기기보다 촬영에 집중하는 모습이 대표적입니다. 기록이 경험을 앞지르는 순간들입니다.
실제로 스마트폰 보급 이후 청소년의 공간 인지 능력과 집중력 저하를 우려하는 연구들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미국심리학회(APA)에 따르면 스크린 타임 증가와 청소년의 인지적 집중력 감소 사이에 유의미한 상관관계가 관찰된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된 바 있습니다(출처: American Psychological Association).
디지털 기술이 앗아간 것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공간을 몸으로 익히는 지형 인지 능력
- 낯선 타인과 대화를 시작하는 사회적 용기
- 길을 잃고 헤매는 과정에서 얻는 우연한 발견
- 기다림과 불확실성을 견디는 인내 감각
이 모든 것이 결과만 남고 과정이 사라지는 시대의 부산물입니다.
대신 느끼는 삶
현대인은 대리 체험(Vicarious Experience)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대리 체험이란 자신이 직접 무언가를 하는 대신, 타인의 경험을 관찰함으로써 간접적인 만족을 얻는 심리적 현상입니다. 음식을 먹는 사람의 영상을 보며 포만감을 느끼는 먹방 문화, 타인이 제품 포장을 뜯는 모습을 보며 구매 욕구를 해소하는 언박싱 콘텐츠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저도 솔직히 이건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야식이 당기는 밤에 배달 앱 대신 먹방 영상을 틀어놓고 잠든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니까요. 처음에는 편리해서, 나중에는 습관처럼.
문제는 이 습관이 쌓이면서 발생하는 인지적 변화입니다. 미디어 연구에서 자주 등장하는 개념인 인지적 오프로딩(Cognitive Offloading)은 기억, 판단, 감정 경험 같은 인간 고유의 인지 기능을 외부 기기나 콘텐츠에 의탁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 내가 직접 느끼고 생각해야 할 것들을 스마트폰과 플랫폼이 대신 처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긴 글을 읽는 대신 요약 콘텐츠를 소비하고, 생각을 이어가는 대신 알림에 반응하는 방식이 이에 해당합니다.
저자 크리스틴 로젠은 이처럼 가공된 간접 경험이 일상을 채울수록, 사람들은 점점 자신의 감정을 아웃소싱하게 된다고 지적합니다. 감정을 느끼는 주체가 나 자신이 아니라 알고리즘이 선별한 콘텐츠가 되는 셈입니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의 2023년 디지털 뉴스 리포트에 따르면, 국내 성인의 숏폼 콘텐츠 소비 시간은 전년 대비 30% 이상 증가했으며, 긴 글 기반의 텍스트 콘텐츠 소비는 반대로 감소 추세를 보였습니다(출처: 한국언론진흥재단). 경험을 소비하는 방식이 점점 얕고 빠른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기술의 주인으로 살아가기
그렇다면 스마트폰을 버리고 지도를 들고 다니자는 말을 하고 싶은 걸까요. 아닙니다. 저도 내비게이션 없이는 낯선 도시에서 약속 시간을 지키기 어렵다는 걸 압니다. 저자 역시 기술 그 자체를 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핵심은 디지털 리터러시(Digital Literacy)입니다. 디지털 리터러시란 단순히 기기를 잘 다루는 능력이 아니라, 기술을 사용할 때와 내려놓을 때를 스스로 판단하고 조율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기술의 주인으로서 선택적으로 활용하는 태도입니다.
제가 직접 시도해 봤는데, 생각보다 작은 변화들이 꽤 효과적이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스마트폰을 확인하는 습관을 30분 미루는 것만으로도 하루 시작의 밀도가 달라지는 걸 느꼈습니다. 걸을 때 이어폰을 빼는 날을 일주일에 하루 정도 두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었습니다. 멍하니 걷는 그 시간 안에서 요즘 잊고 지내던 생각들이 떠올랐습니다.
저자가 강조하는 직접 경험 회복의 실천 방향은 거창하지 않습니다.
- 스마트폰 없이 산책하거나 자연 속에서 시간 보내기
- 요약본이 아닌 책 한 권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내기
- 온라인 메시지 대신 직접 얼굴을 보고 대화하기
- 결과보다 과정을 즐기는 활동에 의식적으로 시간 투자하기
무엇보다 중요한 건 지루함을 견디는 감각을 다시 키우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손글씨로 무언가를 쓰고, 버스를 기다리며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답장이 바로 오지 않아도 불안하지 않은 상태. 그게 기술이 아직 대신해 줄 수 없는 인간의 시간입니다.
팬데믹을 거치면서 비대면과 디지털 연결에 더 깊이 의존하게 된 이후, 저는 가끔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지금 이 경험은 내가 직접 하고 있는 건가, 아니면 화면이 대신 살고 있는 건가. 그 질문 하나가 생각보다 많은 걸 바꿔줬습니다.
경험은 대신 살아줄 수 없습니다. 불편하고 느리더라도 직접 보고, 느끼고, 헤매는 시간 안에서 삶의 밀도는 만들어집니다. 기술을 내려놓는 게 어렵다면, 오늘 딱 한 번만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고 목적지 없이 걸어보시길 권합니다. 그 불편함 속에 오랫동안 잊고 있던 무언가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