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이 책을 처음 집어든 건 달리기에 관심이 생겨서가 아니었습니다. 하루키가 쓴 책이라고 해서 읽기 시작했는데, 읽다 보니 달리기 이야기를 하는 척하면서 결국 삶을 이야기하고 있더라고요. 재능이 없어도 꾸준히 버티는 사람이 결국 멀리 간다는 이야기. 저는 그 문장에서 한동안 책을 덮지 못했습니다.
지속하는 힘, 재능보다 오래가는 것
이 책을 읽으며 가장 먼저 떠오른 단어가 바로 지속성이었습니다. 여기서 지속성이란 어떤 행동이나 상태가 외부 자극 없이도 스스로의 의지로 반복 유지되는 능력을 말합니다. 하루키는 장편소설을 쓰는 일을 마라톤에 비유하는데, 그 비유가 생각보다 훨씬 정확하게 느껴졌습니다.
마라톤은 42.195km를 달리는 경기입니다. 단거리 선수의 폭발적인 순발력으로는 완주 자체가 불가능한 종목이죠. 마라톤에서 중요한 것은 VO2max(최대산소섭취량), 즉 운동 중 신체가 산소를 얼마나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지를 나타내는 지표보다도, 오히려 페이스 조절 능력과 심리적 내구성입니다. 여기서 페이스 조절이란 자신의 에너지를 균등하게 분배해 끝까지 속도를 유지하는 전략을 의미합니다.
제가 직접 느낀 것도 비슷했습니다. 저는 무언가를 꾸준히 이어가는 데 특별히 재능이 있는 사람은 아닙니다. 작심삼일을 반복하며 살아왔고, 그 사실이 늘 마음 한구석에 걸렸습니다. 그런데 하루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처음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꾸준함은 타고나는 게 아니라 설계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요.
다만 여기서 한 가지 짚고 싶은 부분이 있습니다. "꾸준히 하면 된다"는 말을 누구나 동등하게 적용할 수 있다고 보는 시각도 있는데, 저는 그 부분이 조금 다르게 느껴집니다. 하루키가 말하는 루틴은 전업 작가라는 직업적 자유와 경제적 안정 위에서 가능한 것이기도 합니다. 생계를 병행하면서 자기만의 페이스를 유지하는 일은 훨씬 더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 책의 메시지를 받아들일 때는 그런 맥락도 함께 고려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이 지속성을 이야기하며 보여주는 핵심 태도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매일 정해진 시간에 달리고 글 쓰는 루틴을 유지한다
- 타인의 기록이 아닌 어제의 자신과 비교한다
- 몸이 무거운 날에도 "적어도 걷지는 말자"는 최소 기준을 지킨다
자기 페이스, 비교가 아닌 기준
하루키는 책 전반에서 외부 평가로부터 자신을 분리하는 태도를 일관되게 유지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남의 눈을 신경 쓰지 말라"는 자기계발 슬로건이 아닙니다. 그가 말하는 것은 내적 기준점, 즉 타인의 속도나 성과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상태를 판단 근거로 삼는 태도에 가깝습니다. 여기서 내적 기준점이란 외부 비교 없이 자신의 변화와 성장을 스스로 평가하는 심리적 준거를 말합니다.
하루키가 보스턴 마라톤에서 여학생 그룹을 바라보며 "저 학생들은 엘리트 코스만 달려온 탓에 지는 법을 모를 수도 있다"는 식으로 회고하는 대목입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스스로를 낮추는 겸손의 표현으로 읽을 수도 있지만, 동시에 타인을 평가하는 시선이 담겨 있기도 해서 조금 아이러니하게 느껴졌습니다. 자기 페이스를 강조하면서도 타인과의 비교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다는 점, 그게 어쩌면 더 인간적인 모습일 수도 있겠지만요.
심리학에서는 사회 비교 이론을 통해 이 현상을 설명합니다. 사회 비교 이론이란 사람이 자신의 능력이나 상황을 평가할 때 타인과 비교하려는 본능적 경향을 설명하는 이론으로, 1954년 레온 페스팅거가 제안했습니다. 이 이론에 따르면 비교 자체를 없애는 것은 어렵지만, 비교의 방향을 아래(하향 비교)가 아닌 내부(자기 비교)로 돌리는 것이 심리적 안정에 훨씬 유리하다고 봅니다(출처: APA 심리학회).
현대인이 자기 페이스를 유지하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SNS 환경에서 끊임없이 타인의 일상과 성취에 노출되기 때문입니다. 2023년 기준 국내 성인의 SNS 일평균 이용 시간은 약 46분으로 집계되었는데, 그 시간의 상당 부분이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는 데 쓰입니다(출처: 한국방송통신위원회). 그런 환경에서 하루키가 말하는 "자기 리듬"을 지키는 일은 의식적인 노력 없이는 쉽지 않습니다.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르게 접근해야 했습니다. 비교를 안 하려고 노력하면 오히려 더 신경 쓰이더라고요. 차라리 비교 자체를 내부로 돌리는 연습, 즉 어제의 제가 오늘의 제보다 조금이라도 더 게을렀는지를 기준으로 삼는 방식이 더 실용적이었습니다.
고독, 창작자가 버텨야 하는 조건
하루키의 글쓰기와 달리기가 공유하는 가장 근본적인 속성은 고독입니다. 소설을 쓰는 일은 본질적으로 혼자 하는 작업이고, 마라톤 역시 결승선까지 자신의 다리로 달려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외부로부터 받을 수 있는 실시간 피드백은 거의 없습니다.
창작 심리학에서는 이를 몰입 상태와 연결 짓기도 합니다. 몰입이란 과제 난이도와 개인 능력이 적절히 균형을 이룰 때 경험하는 완전한 집중 상태를 말하며, 심리학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가 정립한 개념입니다. 이 상태에서는 외부 자극이 오히려 방해가 됩니다. 하루키가 고독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할 때, 그것은 사실상 몰입 환경을 스스로 만들어낸다는 뜻에 가깝다고 저는 이해했습니다.
물론 고독을 견디는 일이 누구에게나 창작의 전제 조건이 되어야 한다는 시각도 있는데, 저는 그게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봅니다. 혼자 있는 시간이 힘이 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관계 속에서 에너지를 얻고 창작하는 사람도 분명히 있으니까요. 하루키의 방식이 보편적인 정답은 아닐 수 있습니다. 다만 제가 이 책에서 실제로 가져갈 수 있는 것은 고독 자체가 아니라, 외부의 반응 없이도 자신의 작업을 이어가는 태도였습니다.
나이 듦에 대해 하루키가 솔직하게 쓰는 부분도 인상 깊었습니다. 기록이 떨어지고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고, 그 변화에 맞는 방식으로 계속 달리는 쪽을 선택합니다. 이것이 이 책이 단순한 자기계발서와 다른 지점입니다. 더 강해지라고 말하는 대신, 지금의 자신으로 계속 나아가는 방법을 찾으라고 말하고 있으니까요.
결국 이 책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한다는 답을 주지 않습니다. 대신 조용히 묻습니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멈추지 않고 이어가고 있는가. 저는 그 질문이 아직도 머릿속에 남아 있습니다. 속도나 성과보다 지속 여부가 더 중요한 질문일 수 있다는 생각,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머리로는 알아도 가슴으로는 와닿지 않았던 이야기입니다. 하루키의 달리기 이야기가 결국 내 삶의 이야기로 읽히는 건, 그가 거창한 교훈이 아니라 자신이 실제로 살아온 방식을 담담하게 썼기 때문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