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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고 온 여름 (기억의 감각과 침묵의 서사, 가족의 결핍)

by 책읽기 프로젝트 매니저 2026. 5. 21.

두고 온 여름




가족이란 이름만으로 자연스럽게 이해가 되는 관계일까요. 저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오래 믿어왔던 그 전제가 흔들리는 경험을 했습니다. 성해나의 [두고 온 여름]은 아이였던 시절의 상처가 시간이 흘러서야 비로소 말로 꺼내지는 과정을 담담하게 따라갑니다. 읽는 내내 '이건 내 이야기인가' 싶은 순간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기억의 감각과 침묵의 서사

일반적으로 소설은 사건으로 움직인다고 알려져 있지만, 제 경험상 이 작품은 그 공식을 정면으로 비껴갑니다. [두고 온 여름]에는 극적인 반전도, 갑작스러운 비극도 없습니다. 그런데 읽고 나면 마음이 꽤 오래 무겁습니다. 이유가 뭔지 생각해봤는데, 작가가 다루는 방식이 꽤 특이했습니다.

이 소설은 '기억의 감각'을 중심 서술 장치로 씁니다. 여기서 기억의 감각이란 특정 사건을 직접 서술하는 대신, 그 시절의 분위기와 감각적 인상을 통해 독자가 스스로 기억을 재구성하도록 유도하는 방식입니다. 뜨거운 공기, 눅눅한 냄새, 누군가의 말투 같은 파편들이 사건 대신 이야기를 끌고 갑니다. 그래서 독자는 인물의 기억을 읽는 게 아니라 자신의 과거 여름을 떠올리게 됩니다. 저도 모르게 오래전 어느 여름의 냄새가 떠올랐고, 그게 상당히 당혹스러웠습니다.

또 하나 주목할 만한 것은 소설이 '침묵의 서사'를 구조적으로 활용한다는 점입니다. 침묵의 서사란 등장인물이 말해야 할 순간에 말하지 않음으로써, 그 공백 자체가 감정을 전달하는 서사 기법입니다. 인물들은 진심을 제때 꺼내지 못하고, 그 침묵 안에 사랑과 미안함과 두려움이 뒤엉킵니다. 처음에는 답답하게 느껴졌는데,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그 답답함이 나중에는 현실처럼 느껴졌거든요. 실제로도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가장 솔직하지 못하는 경험은 누구나 있을 테니까요.

심리학에서는 이를 '감정 억압'의 패턴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감정 억압이란 부정적인 감정을 의식적으로 표현하지 않으려는 심리적 기제로, 단기적으로는 갈등을 피하지만 장기적으로는 관계를 서서히 거리 두게 만드는 효과를 낳습니다(출처: 한국심리학회). 작품 속 인물들은 정확히 그 패턴 위에서 살아가고 있었고, 그래서 더 현실적으로 느껴진 것 같습니다.

이 소설이 독자에게 오래 남는 이유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사건 대신 감각으로 기억을 재현하여 독자의 개인 경험을 끌어들인다
  • 말해지지 않은 감정이 문장 사이의 여백으로 축적된다
  • 과거와 현재를 자연스럽게 교차하며 기억이 현재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보여준다
  • 결말을 명확히 닫지 않아 독자가 직접 여운을 완성하게 만든다

가족의 결핍이 만들어내는 어설픈 거리감

처음에 기하라는 인물은 솔직히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말은 날카롭고, 태도는 차갑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인물은 소설에서도 실생활에서도 쉽게 공감이 안 되는 편입니다. 그런데 읽다 보니 그 날카로움이 포장지였다는 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안에는 누구도 쉽게 채워줄 수 없는 공백이 자리하고 있었고, 그게 '아동기 정서적 결핍'의 모습과 겹쳐 보였습니다. 아동기 정서적 결핍이란 부모나 양육자로부터 충분한 정서적 반응을 받지 못하고 자라며 형성되는 심리적 공백 상태로, 성인이 된 이후에도 친밀한 관계를 어렵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합니다.

그럼에도 저는 재하의 어머니에게 더 깊이 마음이 갔습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기하에게 끊임없이 다가가면서도, 동시에 부담이 되지 않도록 스스로 거리를 조절하는 모습이 참 먹먹했습니다. 보통 가족 소설에서 이런 인물은 희생적 모성의 상징으로 소비되기 쉬운데, 이 작품은 그 함정을 피했습니다. 그녀의 다정함은 억지로 오게 만드는 사랑이 아니라, 언제든 돌아올 수 있도록 자리를 비워두는 다정함에 가까웠습니다. 그 차이가 작은 것 같아도 사실은 굉장히 큰 차이입니다.

가족 관계 연구에서는 이런 방식을 '비침습적 돌봄'이라고 부릅니다. 비침습적 돌봄이란 상대의 경계를 존중하면서도 지속적인 관심과 안전망을 제공하는 양육 방식으로, 특히 상처를 가진 아이에게 효과적인 접근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출처: 국립정신건강센터). 소설은 이 개념을 이론으로 설명하지 않지만, 재하 어머니의 행동 하나하나가 그것을 정확히 구현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직접 읽어보면서 이 인물이 왜 이렇게 행동하는지 이해하게 된 건 중반을 넘어서였는데, 그 순간의 감각이 아직도 선명합니다.

결말은 완전히 봉합되지 않습니다. 기하와 재하 어머니의 거리는 어설픈 상태로 마무리됩니다. 이걸 두고 '미완성 서사'라고 볼 수도 있지만, 저는 오히려 그게 더 현실적이라고 느꼈습니다. 실제 관계에서도 상처는 한 번에 치유되지 않고,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는 순간은 좀처럼 오지 않으니까요.

[두고 온 여름]은 빠른 전개나 강렬한 사건을 원하는 독자에게는 다소 느리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저도 처음 100페이지 정도는 어디로 가는 소설인지 좀 헤맸습니다. 그런데 책을 덮고 나서 일주일쯤 지났을 때도 특정 장면이 떠오른다면, 그게 이 소설이 잘 쓰인 소설이라는 증거가 아닐까 싶습니다. 서툴고 불완전한 관계 안에서도 건네진 온기는 오래 남는다는 것, 이 소설이 가장 조용하게 전하는 말입니다. 지나간 여름이 있는 분들께 권하고 싶은 소설입니다.


참고: (한국심리학회), (국립정신건강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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