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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프롬은 1956년에 이미 단언했습니다. 사랑은 우연히 찾아오는 감정이 아니라, 배우고 훈련해야 하는 기술(Art)이라고. 처음 이 문장을 읽었을 때 저는 솔직히 좀 당황했습니다. 사랑을 기술로 정의한다는 게 너무 차갑게 느껴졌거든요. 그런데 음식점을 운영하며 사람을 매일 상대했던 제 경험과 맞닿는 순간, 이 말이 전혀 다르게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사랑을 '기술'로 보면 뭐가 달라질까
프롬이 말하는 사랑의 기술(Art of Loving)이란 단순히 상대에게 잘해주는 방법을 익히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Art란 음악이나 회화처럼, 재능이 있어도 연습 없이는 완성되지 않는 능력 전체를 가리킵니다. 쉽게 말해 타고난 감정만으로는 관계를 지속할 수 없고, 의도적인 노력이 쌓여야 비로소 사랑이 깊어진다는 뜻입니다.
프롬은 진정한 사랑을 구성하는 네 가지 핵심 요소로 보살핌(Care), 책임(Responsibility), 존중(Respect), 앎(Knowledge)을 제시합니다. 이 가운데 제가 가장 오래 생각한 건 '앎'이었습니다. 오래 만났다는 이유로 상대를 다 안다고 착각하는 순간, 관계는 조용히 굳어가기 시작한다는 지적이 꽤 날카롭게 느껴졌거든요.
그런데 제가 직접 경험해보니, 이 네 가지 요소보다 먼저 필요한 게 있었습니다. 바로 '버리는 것'입니다. 새로운 표현법을 배우기 전에, 상대를 내 기준으로 평가하는 습관과 결과를 빨리 기대하는 조급함을 내려놓는 일이 훨씬 더 어려웠습니다. 프롬은 사랑을 배우는 능력으로 설명하지만, 제 경험상 사랑은 무언가를 추가하는 과정인 만큼이나 이미 가진 것을 내려놓는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 보살핌(Care): 상대의 성장과 행복을 바라는 꾸준한 행동
- 책임(Responsibility): 의무가 아닌, 상대를 존중하기 때문에 생기는 자발적 자세
- 존중(Respect): 상대를 내 뜻대로 바꾸지 않는 것, 집착과 사랑을 구분하는 기준
- 앎(Knowledge): 사람은 계속 변하므로 이해도 계속 갱신해야 한다는 원칙
거리감이 오히려 관계를 오래가게 했던 이유
음식점을 운영할 때, 저는 단골을 만드는 방법은 최대한 친해지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름을 외우고, 취향을 기억하고, 먼저 말을 건네는 식으로요. 처음엔 분위기도 좋았고 반응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어떤 손님들은 제가 바쁜 날 먼저 인사를 못하면 서운함을 드러냈고, 한 번 서비스로 드렸던 메뉴를 다음 방문에서도 기본으로 기대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더 친절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상대는 그걸 기준점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겁니다.
반면, 딱 필요한 대화만 나눴던 한 손님은 가장 오래 단골로 남았습니다. 언젠가 용기 내어 이유를 물었더니 돌아온 대답이 "여기는 편하게 있을 수 있어서요. 친절한데 부담은 없잖아요"였습니다. 그 한마디가 저를 한참 멈추게 했습니다.
『사랑의 기술』에서 프롬이 말하는 존중(Respect)의 핵심도 여기에 있습니다. 존중이란 상대를 내 방식으로 채우려 하지 않고, 상대가 자기 페이스로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남겨두는 태도입니다. 쉽게 말해 사랑한다는 이유로 상대의 영역을 모두 채우려 드는 순간,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소유욕으로 기울기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제가 경험한 그 손님과의 관계가 바로 프롬이 말한 건강한 거리의 실제 사례였던 셈입니다.
출처: 미국정신의학회(APA)에 따르면, 건강한 대인관계는 상호 존중과 개인 경계(boundary)를 바탕으로 유지될 때 심리적 안정감이 높아진다고 설명합니다. 프롬의 철학이 현대 심리학에서도 여전히 유효하게 다뤄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관계설계 없이 감정만으론 버티기 어렵다
프롬은 현대 사회가 인간을 소비의 대상으로 만든다고 비판합니다. 이른바 시장 지향적 성격(marketing orientation)이라는 개념인데, 사람이 자신을 직업·외모·능력까지 포함한 상품처럼 인식하고 '팔리는 자아'를 만들어가는 경향을 가리킵니다. 쉽게 말해 사랑조차 더 좋은 조건을 찾아 갈아타는 소비 행위처럼 작동하게 된다는 경고입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저는 이 책이 연애론을 다룰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실제로 읽어보니 사랑을 어렵게 만드는 사회 구조에 대한 진단이 본문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고 있었거든요. SNS로 관계를 맺고, 알고리즘이 다음 사람을 추천해주는 지금 시대에 이 지적은 1956년보다 훨씬 더 현실적으로 느껴집니다.
제가 책을 덮고 가장 오래 붙잡고 있던 질문은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가 아니었습니다. "나는 누군가에게 긴장하게 만드는 사람인가, 아니면 편안하게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인가"였습니다. 관계의 품질은 결국 감정의 크기보다, 서로가 어떤 방식으로 관계를 설계하느냐에 더 많이 좌우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쪽이 계속 희생하고 다른 쪽이 계속 의존하는 구조라면, 감정이 아무리 뜨거워도 결국 지치게 됩니다.
출처: 미국심리학회(APA) 관계 연구에서도 장기적으로 안정된 관계를 유지하는 핵심 변수로 감정 강도보다 상호 책임감과 신뢰 구조를 꼽습니다. 프롬이 말한 자기애(Self-love) 개념도 같은 맥락입니다. 자기애란 이기심과 전혀 다른 개념으로, 자신을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 타인도 소유하지 않고 건강하게 대할 수 있다는 원리입니다. 제 경험상 이건 꽤 정확합니다. 스스로를 너무 낮추는 사람일수록 관계에서 과도하게 의존하거나 반대로 집착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사랑의 기술은 연애하는 사람만 읽는 책인가요?
A. 아닙니다. 프롬은 연인 관계뿐 아니라 부모와 자녀, 친구, 동료, 심지어 자기 자신과의 관계까지 모두 사랑의 범주로 설명합니다. 오히려 연애보다 인간관계 전반이 반복적으로 어렵게 느껴지는 분들에게 더 큰 울림을 줄 가능성이 높습니다.
Q. 철학책이라 읽기 어렵지 않나요?
A. 철학적 개념이 등장하긴 하지만, 분량이 짧고 문장이 직접적이라 인문학 입문서로 적합합니다. 다만 빠르게 읽고 넘기는 책보다는 자신의 경험과 연결하며 천천히 읽는 편이 훨씬 오래 남습니다. 제 경우엔 한 챕터 읽고 잠시 덮어두는 방식으로 읽었는데, 그게 더 잘 맞았습니다.
Q. 에리히 프롬의 다른 책도 함께 읽어야 하나요?
A. 필수는 아닙니다. 다만 프롬의 핵심 개념인 시장 지향적 성격이나 소유와 존재의 차이를 더 깊이 이해하고 싶다면, 『자유로부터의 도피』나 『소유냐 존재냐』를 이후에 읽으면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사랑의 기술』 하나만 읽어도 충분히 독립적인 읽기가 가능합니다.
Q. 갈등 해결 방법이나 대화법도 알려주나요?
A. 이 부분은 솔직히 기대보다 적습니다. 프롬은 '어떻게 말할 것인가'보다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에 집중하기 때문입니다. 즉각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대화 기술이나 갈등 중재 방법을 원하신다면, 이 책보다는 비폭력 대화 관련 서적을 병행하시는 편이 현실적입니다.
결론
『사랑의 기술』은 저에게 사랑을 더 잘하는 방법을 알려준 책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제가 그동안 사랑이라고 부르던 것들을 다시 들여다보게 만든 책이었습니다. 가까워지려고 애쓰던 관계에서 정작 상대의 공간은 얼마나 지켜줬는지, 좋은 사람을 찾는 데 쓴 에너지만큼 좋은 사람이 되는 데도 투자했는지 묻게 만들었습니다.
한 번 읽고 끝낼 책이 아닙니다. 삶의 시기마다 다른 문장이 눈에 들어오는 책이기도 합니다. 지금 관계가 힘든 분이든, 관계가 반복적으로 같은 지점에서 막히는 분이든, 한번 천천히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읽는 동안 자연스럽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되는데, 그 시간 자체가 이 책의 가장 큰 가치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