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가 이 책을 펼친 건 '살구'라는 단어의 이중적 의미를 우연히 알게 된 뒤였는데, 책 속에도 그 겹겹이 쌓인 의미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자몽살구클럽의 이중적 의미
솔직히 처음에는 제목이 장난스럽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자몽살구클럽, 독자의 시선을 끌려는 마케팅 전략이겠거니 했습니다.
그런데 읽다 보니 이 이름 자체가 하나의 문학적 장치였습니다. 이중적 기표, 쉽게 말해 하나의 단어나 기호가 두 가지 이상의 의미를 동시에 품는 표현 방식인데, 이 책은 제목부터 그 원리를 그대로 구현하고 있었습니다. 실은 '살아가기 위한 모임'이라는 반전이, 글자 그대로 제목 안에 숨어 있었습니다.
저는 이 책을 읽기 전에 작가 한로로의 노래 '사랑하게 될거야'를 오래 들었습니다. 작년 내내 반복해서 들었던 곡이었는데, 그 노래에 담긴 분위기가 소설 전체에도 흐르고 있었습니다. 감정을 설명하기보다 이미지로 건네는 방식, 읽고 나서도 한참 머릿속에 남는 그 감각이 비슷했습니다.
작가는 단어 하나에도 여러 겹의 의미를 심어두는 방식을 쓰는데, 특히 바다를 묘사한 부분이 기억에 남습니다. 바다가 세상의 모든 것을 저항 없이 받아들이며 더 넓어진다는 표현에서 저는 이 소설 전체의 태도를 읽었습니다. 좋은 어른이란 누군가의 상처를 쉽게 판단하지 않고 그냥 품어주는 존재일 수 있다는 생각이 그 문장에서 왔습니다.
청소년 우울,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깊다
많은 어른들이 청소년의 고통을 과소평가합니다. 저도 솔직히 그런 경향이 없지 않았습니다. 공부 스트레스, 친구 사이 갈등 정도는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는 막연한 믿음 말입니다.
그런데 청소년 정신건강 데이터를 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2023년 청소년 건강행태 온라인조사에 따르면, 국내 청소년의 약 28.7%가 최근 1년간 2주 이상 지속되는 우울감을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출처: 질병관리청). 거의 세 명 중 한 명꼴입니다. 이 수치를 보고 나서야 소설 속 인물들이 결코 예외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걸 실감했습니다.
여기서 우울감이란 단순한 기분 저하가 아니라, 일상적인 활동에 흥미를 잃고 무기력함이 2주 이상 지속되는 임상적 상태를 가리킵니다. 청소년기에 이 상태가 방치되면 정서 조절 능력 발달 자체가 저해될 수 있다는 점에서 심각성이 더 큽니다.
이 책이 그리는 인물들이 특별히 약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점도 중요합니다. 이들은 도움을 원하지만 요청하는 방법을 모릅니다. 자신의 아픔을 말했다가 이상한 사람으로 보일까 두렵고, 약해 보일까 걱정합니다. 이 심리를 심리학에서는 도움 추구 회피(help-seeking avoidance)라고 부릅니다. 쉽게 말해, 도움이 필요하다는 걸 알면서도 도움을 요청하는 행동 자체를 피하게 되는 심리 패턴입니다.
제 경험상 이건 청소년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비슷한 패턴이 반복된다는 걸 주변에서도, 저 자신에게서도 느낍니다. 이 책이 청소년 문학이라는 분류에 묶여 있지만 어른들이 더 주의 깊게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입니다.
이 소설에서 인상 깊었던 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청소년의 감정을 설명하는 대신 장면으로 보여주는 서술 방식
- 문제의 원인을 개인의 나약함이 아닌 사회 구조에서도 함께 찾는 시각
- 완전한 치유가 아닌 '함께 있음'을 회복의 기준으로 삼는 태도
- 시적 언어로 빚어낸 감정 표현, 이미지처럼 오래 남는 문장들
연결이 희망보다 먼저다
많은 성장소설은 마지막에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열심히 살면 좋아질 거라는 메시지로 끝맺습니다. 저도 그런 결말을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은 그 길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인물들은 끝까지 완전히 나아지지 않습니다. 여전히 흔들리고, 여전히 아픕니다. 그러나 이전과 달라진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이제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 책이 제안하는 것은 치유보다는 사회적 연결(social connection), 즉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의미 있는 방식으로 이어져 있다는 감각입니다. 여기서 사회적 연결이란 단순히 함께 있다는 물리적 상태가 아니라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고 기억하며 인정하는 정서적 유대를 의미합니다.
실제로 하버드대학교 성인 발달 연구(Harvard Study of Adult Development)는 80년 이상의 추적 조사를 통해 삶의 만족도와 건강에 가장 크게 기여하는 요인이 부, 명예, 유전이 아닌 관계의 질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출처: Harvard Health Publishing). 이 연구 결과를 알고 나서 이 소설을 다시 떠올리면, 작가가 하고 싶었던 말이 더 선명하게 보입니다.
제가 직접 읽어보니, "우리와 함께 합시다", "우리가 필요합니다"라는 동아리 홍보 문구가 가장 오래 마음에 남았습니다. 단순한 문구가 아니라 세상 어딘가에서 혼자 버티고 있는 사람에게 건네는 구조 신호처럼 읽혔습니다. 너희의 잘못이 아니라고, 꼭 살아내라고 말하는 것처럼요. 그 문장들을 읽으면서 마음이 먹먹해졌습니다.
이 세상이 행복만으로 채워진 곳이 아니라는 건 누구나 압니다. 비가 온 뒤에야 무지개가 뜨는 것처럼, 사람의 삶도 아픔과 눈물을 지나며 깊어지는 것 같습니다. 이 책은 그 과정을 혼자 버티지 않아도 된다고,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줬습니다.
책을 덮은 뒤 따뜻함이 남았습니다. 지금 주변에 힘들어 보이는 사람이 있다면, 거창한 위로보다 그냥 옆에 앉아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할지 모릅니다. 이 소설은 그 작은 행동이 얼마나 큰 의미가 될 수 있는지를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보여줍니다. 한 번쯤 직접 읽어보시길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