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신은 지금 진짜 자신으로 살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까? 성해나의 소설 [혼모노]를 읽다가 저도 모르게 책을 덮고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불편할 정도로 현실적인 인물들이 거울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이 책이 뭔가 다르다는 생각이 든 건 첫 챕터를 넘기기도 전이었습니다.
진짜 자아를 포장하는 인간의 민낯
'혼모노'는 일본어로 '진짜', '진품'을 의미합니다. 단순히 원본과 가짜를 구분하는 단어지만, 이 소설에서 그 의미는 훨씬 복잡하게 작동합니다. 제가 이 제목에서 처음 느낀 건 묘한 오타쿠스러운 어감이었습니다. 한국어로 그냥 '진짜'라고 했다면 이 정도 인상을 남기지 못했을 겁니다. 일본어 특유의 질감이 소설의 분위기 자체와 맞닿아 있습니다. 낯설고, 어딘가 사회와 조금 동떨어진 느낌.
소설 속 인물들은 영웅도 악인도 아닙니다. 그냥 평범한 사람들인데, 그 평범함 속에 사랑받고 싶은 욕구, 인정받고 싶은 욕구, 타인보다 우위에 서고 싶은 욕구가 뒤섞여 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자기표현 편향이라고 부릅니다. 자기표현 편향이란 타인에게 더 좋게 보이기 위해 자신의 실제 모습과 다르게 행동하거나 말하는 경향을 의미합니다. SNS에 행복한 사진만 올리고, 실제로는 괜찮지 않으면서 "괜찮아"라고 말하는 것, 모두 이 편향의 산물입니다.
저도 솔직히 이 부분에서 꽤나 뜨끔했습니다. 책 속 인물을 보며 "저 사람 왜 저러지"라고 생각하다가, 어느 순간 제가 비슷한 상황에서 비슷하게 행동했다는 게 떠올랐습니다. 작가가 독자를 그쪽으로 유도하는 방식이 정말 교묘합니다.
관계 결핍이 만들어내는 아이러니
이 소설의 핵심 구조는 결국 관계입니다. 인물들은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려 하지만, 가까워질수록 오히려 더 깊은 고립감을 느낍니다. 이 역설이 이 책에서 가장 날카롭게 파고드는 지점입니다.
사회심리학에서는 이런 현상을 친밀성의 역설이라고 설명합니다. 친밀성의 역설이란 관계가 깊어질수록 상대에 대한 기대와 실망도 함께 커지는 현상으로,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오히려 가장 큰 상처를 받는 이유를 설명하는 개념입니다. 실제로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연구에 따르면, 한국인의 정서적 고립감은 가족 및 친밀한 관계 내에서 더 뚜렷하게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고 보고된 바 있습니다(출처: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성해나 작가는 거창한 사건 대신 아주 작은 대화와 침묵으로 관계의 균열을 묘사합니다. 누군가의 무심한 한마디, 대화 중에 흘러간 짧은 침묵 하나가 관계를 천천히 무너뜨립니다. 제 경험상 이건 소설보다 현실에서 먼저 배운 감각입니다. 친한 사람과의 관계가 흔들릴 때를 돌아보면, 언제나 사소한 말 한마디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작가가 그걸 문장으로 정확하게 집어낸다는 게 솔직히 좀 소름 돋았습니다.
관계의 불균형, 즉 한쪽이 더 사랑하고 한쪽이 더 기대하는 구조도 아주 사실적으로 그려집니다. 이 소설을 읽으며 관계를 '균형'의 시각으로 바라봤던 제 시각이 흔들렸습니다.
위선과 자기혐오, 인간이 숨기는 감정들
이 소설이 불편한 이유는 인간의 위선을 미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착한 척하면서 속으로는 비교하고 질투합니다. 타인의 불행에 은근히 안도하고, 타인의 성공 앞에서 초라함을 느낍니다. 작가는 이런 감정들을 있는 그대로 꺼내놓습니다.
심리학에서 이런 내면의 부정적 감각을 다루는 개념으로 인지 부조화가 있습니다. 인지 부조화란 자신이 믿고 있는 가치관과 실제 행동이 충돌할 때 발생하는 심리적 불편감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나는 좋은 사람이다"라고 믿으면서도 타인을 질투하는 자신을 마주할 때 느끼는 그 찝찝함입니다. 이 소설은 독자에게 바로 그 인지 부조화를 반복적으로 경험하게 만듭니다.
제가 직접 읽어보니, 이 불편함은 단순히 "어두운 소설이라서"가 아니었습니다. 인물의 감정선이 너무 정확해서 불편한 겁니다. 자기혐오, 열등감, 인정 욕구 같은 감정들이 과장 없이 묘사되어 있어서, 독자는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동시에 자신을 들여다보게 됩니다.
[혼모노]에서 인상적으로 느꼈던 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인물들의 행동이 처음에는 이해되지 않다가 어느 순간 "나라도 저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구조
- 각 에피소드의 결말을 명확하게 닫아주지 않아, 독자 스스로 판단하게 만드는 서사 방식
- 감정을 과하게 설명하지 않는 절제된 문장, 그래서 오히려 여운이 깊은 문체
이 세 가지가 맞물려서 책을 덮고 나서도 인물들의 표정과 말투가 한동안 머릿속에 남습니다.
진짜 나로 산다는 것은 가능한가
[혼모노]는 끝내 명확한 답을 주지 않습니다. 그게 이 소설의 한계일 수도 있고, 동시에 가장 솔직한 태도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후자라고 생각합니다. 현실에서도 인간이 완전히 진짜 자신으로 살아가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현대 사회는 비교를 구조적으로 강요합니다. 더 나은 직장, 더 많은 수입, 더 완벽해 보이는 삶.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점점 자기 자신을 잃어갑니다. 실제로 한국 성인의 삶의 만족도 조사에서, 타인과의 비교가 주관적 행복감을 낮추는 주요 요인 중 하나로 꼽혔습니다(출처: 통계청 사회조사). 소설이 묘사하는 불안이 단순히 픽션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다만 조금 아쉬웠던 부분도 있습니다. 인물들의 감정이 지나치게 냉정하게 묘사되다 보니, 읽는 내내 숨이 막히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불편함 자체가 작가의 의도라고 보입니다. 이 소설은 독자를 편안하게 두지 않습니다. 그게 이 책의 진짜 힘입니다.
결국 이 소설이 남긴 질문은 하나입니다. 자신의 결핍과 위선을 외면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 그게 진짜 자신으로 살아가는 첫 걸음이 아닐까요. 거울을 오래 들여다보는 것처럼 불편하지만, 그 시선을 피하지 않는 용기가 이 소설이 조용히 권유하는 방향이라고 느꼈습니다. [혼모노]가 마냥 유쾌한 책은 아니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오래 기억에 남을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참고: (출처: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출처: 통계청 사회조사)